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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음풍농월 (985)
음풍농월, 짧고 긴 여행 이야기
어디서 공짜 비행기표라도 뚝 떨어지지 않는 한, 아니 설령 그렇다 해도 연말까지는 꼼짝 없이 책상 앞에 묶여 있어야 하므로, 올해는 못 갈 것이 분명한, 그리하여 더욱 가고 싶은, 유럽. 2006년에 처음 발도장 찍은 뒤 2008년, 2009년 잇따라 기회만 닿으면 쪼르르 달려갔다. 밥을 굶는 한이 있어도, 땡빚을 내서라도, 1년에 한 번은 꼭 가야지- 맘먹었는데, 벌써 2년을 건너 뛰다니. 흑. 유럽, 그까이 게 뭔데? 라고 묻는다면, 그냥 좋다고 할 수밖에. 낡고 고즈넉한 도시 위로 흐르는 공기가, 유유자적하면서도 눈빛 생생한 사람들의 아우라가, 아무 도로에서나 무단횡단하는 사람을 당연하게 기다릴 줄 아는 자동차가, 고색창연한 유물 유적과 곳곳에 널린 음악이, 조각이, 예술이.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참으로 미안한 말이지만, 방사능에 고통받을 일본 사람들보다 먼저, '앞으로 해산물 못 먹게 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앞섰다. 타고난 입맛 탓이다. 엄마 뱃속에 있던 아홉 달 동안, 군산 앞바다에서 잡힌 홍어와 여타의 해산물들로 몸을 키운 탓이다. 고기는 안 먹어도 살 수 있지만, 안 먹는 것이 여러 모로 좋다고 생각하지만, 완전한 채식가로 살 수 없는 것은 순전히 바다에서 나는 것들 때문이다. 홍어를 필두로 오징어 낙지 문어 게 해삼 멍게 개불 새우 소라 전복 미더덕 바지락 대합 꼴뚜기 쭈꾸미 홍어 가오리 옥돔 조기 갈치 명태, 들 때문이다. 써놓고 보니 좋아하는(실은 환장하는) 해산물이 이렇게 많았나 싶어 새삼 놀랍다. 안 좋아하는 것도 있냐고? 물론 있다. 고등어 삼치 참치 연어 장어 정도. 써놓..
제 12회 전주국제영화제 * 2011년 4월 28일~5월 6일 벌써 12회째구나. 명색이 고향이면서도 전주영화제에 제대로 참석해본 적이 없었다. 3년 전쯤, 우연히 집에 온 기간이 맞아 영화 한 편 보고 올라갔던 게 유일한 참여. 이번엔 마음먹고 누비고 있다. 영화 11편을 예매했고, 개막 다음날부터 영화의 거리에 출근도장 찍고 있는 중. 지금까지 '그들의 이야기는 어디에?' / '인사이드 잡' / '울부짖는 남자' / '카라크레마다' / '옥희의 영화' / '동굴 밖으로' / 6편을 보았고, 5편 남았다. 내일이 고비다. 무려 3편. 과연 3편을 견딜 수 있을가? 두 편 보고 나면 진이 빠져버리니 원. 옛말 그른 거 하나 없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1초라도 젊을 때, 부지런히 보고 다니고 즐겨야..
작년, 모 기업 사보 취재차 찾아갔던 충북 음성 정크아트공원. 공원이라기에는 민망하고 야외 전시관이라 하기에도 너무 벌판인 그곳에, 쓰레기와 폐품으로 만든 놀라운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윤영기 씨라는, 수줍음 많고 손끝 야무진 정크아티스트가 만들어낸 놀라운 정크아트의 세상. 젊지 않은 나이에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사비 털어 폐품과 고철 속을 뒹구는 그를, 가족들도 썩 달가워하지 않고 세상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건만, 그는 참으로 오랜 시간 홀로 묵묵히 공부하고 연구하며 자신만의 정크아트를 일궈왔다. 친환경, 생태 따위 말로만 나불대왔고, 이젠 그나마 나불대지도 않는 이 사회에서 쓰레기와 폐품을 주워다 만드는 그의 예술이 제대로 예술 대접 받을 그날이 과연 올 것인지. 꼭 한 번 들러보시라. 정크아트..
햇볕과 물, 그리고 지극한 정성과 관심. 꽃 피울 때 필요한 모든 것. 사람도 사랑도 꽃 같아서, 이중 뭐 하나만 빠져도 금세 시들해진다. 아파트 베란다에 어머니가 가꾸시는 사랑초. 사랑초라는 아이가 있다는 것도, 보라색 이파리와 너무도 강렬하게 대비 되는 하얀 꽃을 피운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이 강렬함 따위, 제 것이 아니라는 듯 능청 부리는 천연덕스러움에 이끌려 한참을 보다. 봄이라 꽃을 피운 줄 알았더니, 어머니 말씀이, 햇볕만 좋으면 겨울에도 핀단다. 1년 내내 틈만 나면 꽃을 피운단다. 추워 죽겠는데, 겨울에는 꽃도 좀 쉬어주는 게 좋지 않으려나? 겨울에 보면 철 모르는 것 같아 좀 거시기 하겠다 싶었으나, '그건 네 생각이고.'라는 듯 꽃잎이 하늘거렸다. 그렇지 뭐. 인간이 무슨 권리로. 맘..
전주에 와있으면서 좋은 점 하나는, 간간이 '맛있는 것'을 얻어먹는다는 것이다. 내 돈 안들이고, 내 발로 찾을 필요 없이 편하고 기분 좋게. 전주 토박이로 40년을 살면서 여기저기 안 다녀본 곳 없는 작은오빠인지라, 그가 고르는 음식점들은 꽤나 믿을만 하다. 그래봐야 오빠네 식구나 나나, 엄마나, 입맛이 그리 화려하지 않아서 다니는 곳은 -순두부, 해물칼국수, 추어탕- 같이 늘 소박한 곳들 뿐이지만. (그 소박한 것들이야말로 진짜배기 맛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남부시장 안에 있는 남문피순대. 일요일 5시쯤 갔는데도, 이미 사람이 바글바글, 자리가 꽉 차 있었다. 이곳 또한 우리나라의 오래된 맛집들의 가장 기본인 '할머니 손맛'을 자랑하고 있었고, 20년인가 30년인가 되었다고. 원조의 포스 팍팍 풍겨주..
2011년 1월 제주 여행. 폭설과 바람 앞에서 난감하게 즐거워하다. 체인이란 걸 처음으로 구경하고, 처음으로 체인을 감고, 언덕을 오르다 체인이 끊어지고, 그래서 공항 근처 렌터카 업체로 다시 가서 체인을 받아오고 하는 등...3박4일 내내 체인을 둘러싼 눈과의 실랑이가 계속된 여행. 이틀째 밤 제주로 나갔다가 숙소인 서귀포 호텔로 돌아가는 밤, 하필이면 공동묘지 근처에서 체인이 끊어져 차가 오도가도 못하고 계속 헛바퀴를 도는 바람에 '이것은! 제주 귀신들의 장난?' 하며 덜덜 떠는 나를, 특유의 냉정하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달래주던 욱. 밑에서 덤비는 눈발하고 싸우는 것도 힘든데, 귀신 나온다고 징징거리고 있는 늙은 여친이 얼마나 어이 없었을꼬. 지금 생각해도 참 부끄럽다. 그날, 그 식은땀 나던 경험..
2011년 1월. 욱과 함께 한 3박4일 제주 여행. 제주에 도착하고서 제일 먼저 만난 것은, 흩날리는 눈발이었다. 비행기가 땅에 닿으면서 점점 심해진다 싶더니 공항을 벗어날 무렵에는 제주 제일의 특산품인 '바람'과 손잡고 가히 '돌풍을 동반한 폭설'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제주에 온 첫날, 숙소로 가기 전에 제일 먼저 들르고 싶었던 곳은 4.3평화공원. 그동안 제주를 네 번 찾았으나 늘 홀로 여행으로 차 없이 걷거나 버스를 타고 다녔던 지라, 선뜻 찾기가 쉽지 않았다. 자동차를 빌리는 여행이니, 그동안 못가본 곳을 마음껏 다녀보리라는 욕심을 세웠고, 덕분에 3박4일 내내 욱이 운전하느라 고생했다. 이 당시 욱이 운전을 시작한 지는 1년6개월이 조금 넘은 터라 생초보라기에는 그렇고, 능숙한 운전자라고..